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티베트 전쟁 (문단 편집) === 3차 전쟁 === 사천성 군벌 [[류원후이]]는 1927년 이래 시캉성의 13개 현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중국-티베트 국경분쟁에 대한 조정자를 자처하였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 13세]]는 류원후이의 조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난징에 전보를 보내 [[장제스]]가 직접 일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앙정부는 이를 지방의 사소한 충돌로 인식했으나 이 기회에 변방 국경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1931년 4월 몽장위원회 위원 당가삼을 파견하여 조정을 시도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티베트 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국난이 일어났으니 일을 빨리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몽장위원회는 1931년 11월 티베트의 영토 확장을 승인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는데 [[류원후이]] 등 사천군벌들과 시캉의 중국인들이 반발하였다. 몽장위원회는 협정 서명을 잠시 보류하였고 티베트 역시 달라이 라마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협의는 무산되었다. 1932년 2월 28일 국민정부는 조정원을 파견하여 8개월 만에 류원후이에게 일을 처리할 것을 지시하면서 중앙의 조정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던 중 1932년 2월 파안에서 티베트인들이 봉기하여 서강성방군과 서강인민자치위원회를 수립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일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화북과 만주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던 국민정부는 류원후이에게 서강의 군사정치를 맡기기로 결정하고 이를 처리하게 했다. 1932년 달라이 라마 13세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서강을 침공했고 중앙정부는 류원후이에게 무력 사용을 허가했다. 류원후이는 1932년 2월 1개 여단을 증파하였고 덕격, 백옥, 등가, 석거 등 4개현을 점령했다. 류원후이는 창도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가 사천성 내부의 자신의 경쟁자인 [[류샹]]과의 이류지전이 발발한 가운데 영국이 티베트의 편을 들 것을 우려하여 이를 번복하고 티베트에게 적극적인 화해를 요청하였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이에 응하면서 1932년 10월 8일 금사강 상하류의 동안과 서안을 티베트와 사천군의 경계로 삼는다는 협정이 체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